살아있는 테니스 레전드, 라파엘 나달 그는 누구인가?

2019. 8. 7. 20:07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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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빅포 : 로저 페더러, 노박 조코비치, 앤디 머레이 그리고 라파엘 나달이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는 그랜드슬램 타이틀이 아마 올해를 끝으로 판도가 바뀔 듯합니다. 바로 로저 페더러의 은퇴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테니스계는 어떻게 바뀔까요? 나파엘 나달과 조코비치 그리고 앤디 머레이의 세상이 올까요 아니면 뉴페이스가 등장할까요? 오늘은 앞으로 5년간은 충분히 테니스계의 정상을 지킬 한 명, 스페인의 라파엘 나달에 대해서 총정리합니다. 

 

 


유년시절

 

라파엘 나달은 스페인에서 1986년 6월 3일 태어났다. 사업가의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라파엘은 여동생 마리아 이사벨 그리고 삼촌 미구엘은 RCD 말요르카, FC 바르셀로나 그리고 국가대표까지 했던 축구선수였다. 그는 어릴 적 바르셀로나의 호날두 (브라질)를 존경했으며 하루는 삼촌의 소개로 락커룸까지 들어가 같이 사진을 찍었다. 운동 가족인 나달 가족 중에는 프로테니스 선수인 토니 나달이 있었는데 일찌감치 라파의 재능을 파악해서 3살부터 테니스를 시킨다. 

 

8살 때는 12살 이하 테니스 챔피언쉽에서 우승을 했고 축구도 곧잘 잘했다. 토니 나달은 왼손잡이인 그들 더욱더 강하게 트레이닝을 시켜 테니스 선수가 되길 희망했다. 

 

12살에는 스페인과 유럽 주니어 타이틀을 딸 정도로 뛰어났으며 또한 축구선수로도 풀타임으로 활약했다. 나달의 아버지는 테니스와 축구 사이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고 이는 학교 공부를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나달은 결국 테니스를 선택했다. 

 

14살이 됐을때 스페인 테니스 연맹은 마요르카에서 바르셀로나로 이주하라는 제안을 한다. 이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트레이닝을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제안을 한 것이며 그와 그의 가족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는 교육도 우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토니 나달은 "휼룡한 선수가 되기 위해서 꼭 미국을 갈 필요는 없다. 여기 , 너의 고향에서 충분히 될 수 있다."라고 했다. 이는 스페인 테니스 연맹에서 그만큼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의미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스스로 훈련비를 부담했다. 2001년 5월 전 그랜드슬램 챔피언 팻 캐쉬를 상대로 클레이코트에서 승리했다. 


프로 커리어


 

2001년-2004년 

 

15살때 프로 데뷔를 한다. 랭킹 762위였던 나달은 라몬 델가도를 상대로 첫 프로 커리어 승을 거두며 16살 때 프로 데뷔해서 승을 거둔 사람들 중에 역사상 9번째 선수가 된다.

 

2002년 16살의 나이로 윔블던 주니어 토너먼트에서 준결승에 진출한다. 그리고 주니어 데이비스 컵에서 스페인이 미국을 이기는데 일조를 한다. 

 

2003년 두개의 챌린저 타이틀을 획득하며 49위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ATP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루키상을 수상한다. 같은 해  윔블던에 출전하는데 이는 보리스 베커가 1984년 출천 이래로 최연소 윔블던 출전 선수가 된다. 또한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클레이코트의 오픈에서 첫 번째 ATP 타이틀을 들어 올린다. 

 

2004년 호주오픈에는 3라운드까지 진출했으며 아깝게도 다음라운드에서 호주의 휴이트에게 패한다. 그 이후 34위 17살의 소년은 그 당시 랭킹 1위였던 페더러를 마이애미 오픈에서 스트레이트 세트로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한다. 하지만 그다음 라운드에서 퍼르난도 곤잘레스에게 패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코트, 클레이코트의 프렌치 오픈은 왼쪽 발목 부상으로 참여하지 못한다. 

 

18살과 6개월이 된 나달은 당시 랭킹 2위 앤디 로딕을 이기며 스페인이 미국을 이기는데에 큰 도움이 줬다. 그는 51위로 2004년 시즌을 마무리한다. 

 


2005년

 

호주오픈에서는 이 대회 준우승을 한 휴이트에게 4라운드에서 무릎을 꿇는다. 2개월 후 마이애미 마스터스 결승에서 그 당시 넘버1 페더러를 상대로 5세트 접전을 했지만 아깝게 패한다. 이후 나달의 미친 연속 행진은 시작되고 24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아가시가 가진 기록을 깬다. 바르셀로나와 로마 마스터스에서 2004년 프렌치 오픈 준우승자 코리아에서 누르고 그의 시대를 알린다. 그 연속 행진이 나달을 랭킹 5위까지 올렸고 그의 19번째 생일 프렌치 오픈 준결승에서 페더러를 누르고 이틀 후 결승에서 마리아노 푸에르타에게 준우승컵을 주며 첫 번째 출전에 우승한 선수 중 역대 두 번 때 플레이어로 기록된다. 이는 샘프라스가 그의 나이 19살 때 US 오픈 우승 이후에 첫 십 대 선수이기도 하다. 이 우승으로 그는 3위로 올라간다. 3일 후 24연승 행진은 게리 웨버 오픈 퍼스트 라운드에서 멈췄다. 그 후 윔블던에서도 저조했으나 그 이후 다시 연승은 시작되어 16연승을 하고 랭킹 2위로 한 단계 올라간다. 2005 US 오픈에서는 2번 시드로 출전했으나 미국의 제임스 블래이크에게 5세트 접전 끝에 패하고 3라운드에서 멈췄다. 


2006년 

 

호주오픈은 안타깝게도 발부상으로 출전포기한다. 몬테 카를로 마스터스 시리즈에서 페더러를 누르고 우승하며 바르셀로나에서도 타미 로브레도를 누르며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 나달의 페이보릿 프렌치 오픈에서도 결승에서 페더러를 만났지만 클레이에서는 가볍게 이겨준다. 윔블던 시드 2번으로 출전한 나달은 앙드레 아가시를 누르며 결승에 진출하지만 또다시 라이벌 페더러를 만난다. 유독 페더러에게는 강했지만 그라스의 페더러는 4 연속 윔블던 타이틀의 욕심을 부리며 우승컵을 지킨다. 


2007년 

 

호주오픈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한 곤잘레스에게 패한다. 이젠 클레이하면 나달 일정도로 온갖 클레이코트 토너먼트를 석권했다. (클레이의 황제, 토마스 무스터의 기록을 훨씬 앞지르고) 프렌치 오픈의 클레이에서는 페더러도 맥을 못 춘다. 하지만 잔디의 페더러에게는 조금 힘이 딸렸다. 다시 윔블던 결승에서 쓴 고배를 마신다. US Open에서는 넘버 2 시드로 출전했지만 4라운드에서 데이비드 페레르에게 패한다. 나달은 윔블던 결승에서 생긴 무릎 부상이 심해진다. 부상이 심각하다는 여러 가지 루머가 있었다. 

 


2008년

 

유독 하드코트에서 힘을 못쓰는 나달은 호주오픈 2008에서는 선전을 하여 준결승까지 진출한다. 하지만 송가에 막혀 결승진출이 좌절됐다. 2008 프렌치 오픈 타이틀도 '당연히' 나달에게 돌아가며 역대 5번째로 단 1세트도 상대방에게 주지 않고 우승한 5번째 남자가 된다. 그리고 뷰욘 보그의 프렌치 오픈 4연승 기록과 타이가 된다. 윔블던도 3번 연속 결승에 진출한다. 정말 어렵게 힘들게 결국 윔블던 결승에서 페더러를 누른다. 이로서 같은 해 프렌치 오픈과 윔블던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쥔 역사상 3번째 남자가 된다. 그리고 또한 페더러의 잔디코트 65연승과 윔블던 타이틀 5연승에서 브레이크를 건다. 이로서 1위에 등극하게 된다. 겹경사가 터져 베이징 올림픽에서 칠레의 곤잘레스 상대로 이겨서 금메달도 딴다. US 오픈은 안타깝게도 앤디 머레이를 만나 준결승에서 패한다. 

 


2009년 

 

호주오픈에는 퍼르난도 베르다스코를 준결승에서 만나 호주 오픈 역사상 두 번째로 길었던 매치 ; 5시간 14분 끝에 승리하여 첫 번째 하드코트 그랜드슬램 결승에 진출한다. 상대는 또 페더러, 그러나 이번엔 그도 양보하지 않았다. 첫 번째 스페인 선수로, 첫 번째 하드코트의 호주오픈 타이틀을 따낸다. 이날 페더러는 눈물을 흘렸다. 그의 무대인 클레이의 프렌치 오픈에서는 31연승의 기록을 세우며 질주했지만 4라운드에서 멈춘다. 이 패는 2015년 이후 처음이다. 무릎 부상이 심해져 윔블던은 출전 포기를 하였다. US 오픈에는 아르헨티나의 델 포트로에게 패해 준준결승에서 짐을 싼다. 


2010년 

 

호주 오픈에서는 준준결승에서 앤디 머레이를 만나 선전하지만 무릎이 계속 좋지 않아 기량을 뽐내지 못했다. 그의 의사는 2주정도 쉬고 2주 재활훈련에 들어갈 것을 권고했다. 이번 프렌치 오픈에서도 나달-페더러 결승을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지만 소더링이 페더러를 꺾고 올라오는 바람에 나달은 스트레이트 셋으로 가볍게 컵을 올렸다. 윔블던 3라운드에서 필립 페츠쉬너를 만나 5세트에 걸쳐 힘겹게 이겼지만 토니 나달의 비매너적인 행동으로 2000달러의 벌금을 냈다. 그러나 그다음 라운드에서 앤디 머레이를 눌렀고 토마스 버디치를 결승에 눌러서 그의 두 번째 윔블던 타이틀을 가졌고 거의 8번째 그랜드 슬램 타이틀이 되었다. 25살도 채 안된 그런 나이에 말이다. US 오픈에서 결승까지 한 세트도 안 내주며 승승장구했다. 역시 결승에도 노박 조코비치에서 한 세트 만을 주며 우승, 그의 기량의 피크를 때렸다. 이 기록으로 그는 역사상 두 번째로 커리어 골든 슬램이라는 기록을 세운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똑같은 해에 클레이, 잔디, 하드코트에서 전부 우승한 첫 번째 남자로 기록이 됐고 이는 1969 호주의 로드 레이버 이후에 처음이다. 


2011년

 

호주오픈 준준결승에서 햄스트링 부상으로 데이빗 페레르에게 패한다. 또다시 만난 라이벌 '페더러'에겐 절대 양보 안 하는 프렌치 오픈 타이틀, 이번에도 가져간다. 이로서 다시 정상 자리를 꽤 차고 6번째 프렌치 오픈컵을 들어 올린다. 윔블던에서도 결승을 진출하지만 당시 랭킹 2위 조코비치가 챔피언이 된다. US 오픈에서는 데이비드 나발디안을 이기며 기대를 모았다. 이 경기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갑자기 통증을 느끼며 고통스러워며 중단됐는데 이는 근육경련이 원인이었다. 

https://youtu.be/ABY0BR8d_z0


2012년

 

호주오픈에서는 4라운드까지는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올라간다. 준준결승과 준결승을 버디치와 페더러를 누르고 결승까지 가지만 조코비치를 만나 5시간 53분 걸쳐 (그랜드 슬램 중에도 제일 긴 매치 타임) 접전하지만 준우승한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프렌치 오픈도 결승까지 가게 되는데 다시 노박 조코비치를 만난다. 4세트중엔 비로 인해 딜레이된다. 다음날 경기제 제계되고 분위기는 나달로 쏠리게 되어 7번째 프렌치오픈 컵에 키스를 한다. 이로서 뷰욘 보그의 기록을 깨고도 남아 역사상 프렌치 오픈에서 가장 성공한 선수로 이름을 올린다. 잔디에서는 아쉽게도 세컨드 라운드에서 로솔에 진다. 그 이후 건강과 부상 문제로 많은 게임을 뛰지 못하고 시즌을 4위로 마무리한다. 

 

 

 

 


2013년 

 

호주오픈을 2위 앞둔 시기에 나달은 복부 쪽 감염으로 인해 시즌 초반의 게임들을 출전하지 못한다. 2013년 프렌치 오픈에서는 준결승에서 노박 조코비치에 앙갚음을 한다. 그 이후 결승에서는 페레르를 이겨 프렌치오픈 통상 59승을 올린다.

하지만 좀처럼 잔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달은 시드가 없는 랭킹 135위인 스티브 달시스에게 1라운드에서 패한다. 그의 커리어중 그랜드슬램 1라운드에서 진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칼을 갈고 US오픈에서는 그의 라이벌 다시 조코비치를 결승에서 만나 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이로 인해 13개의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거머쥔다.


2014년

 

호주오픈에서는 페더러를 누르고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 결승에는 12-0라는 압도적인 기록으로 아주 쉬워 보일 거라는 게임이 등부상으로 인해 스웨덴 스탠 바브링카에 우승컵을 양보한다. 프렌치 오픈에서 다시 조코비치를 만나서 9번째 프렌치오픈 타이틀 그리고 5번 연속으로 쉬지 않고 컵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윔블던의 준비 운동격인 독일 할레 오픈에서는 레게머리를 한 독일 선수 더스틴 브라운에게 이상하게 말린다. 이 불길한 예감은 윔블던까지 가서 호주의 무서운 십 대 닉 키르기오스에게 4라운드에서 패한다. 2014년 스위스 오픈 이후 그는 맹장수술로 인해 나머지 시즌은 뛰지 못한다. 


2015년 

 

호주오픈은 버디치에게 준결승에 패해 일찍 짐을 쌌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프렌치 오픈에서도 역시 준결승에서 조코비치에 패해서 39번 프렌치오픈 연승이라는 기록이 노박에 의해 깨진다. 다시 만난 더스틴 브라운에게 윔블던 세컨드 라운드에서 라켓을 내려놓는다. US 오픈 써드 라운드에서 이태리의 포그니니를 만나 쓴맛을 보고 일치감치 시즌을 마무리한다. 아무래도 잦은 부상과 수술로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 같다. 더스틴 브라운과의 매치가 재밌어 특별히 영상으로 남긴다. 

https://youtu.be/aWvnXnkQrbU


2016년 

 

2016년 시작도 좋지 않았다. 호주오픈, 페르난도 베르다스코에게 1라운드에서 패한다. 4번 시드로 참가한 프렌치 오픈에서는 2번째 라운드를 이기면서 통산 그랜드 슬램 200승으로 역사상 8번째 이를 이룬 남자로 기록된다. 이번에는 왼쪽 손목부상으로 다음라운드에서 플레이하지 못하고 윔블던까지 뛸수 없게 된다. 하지만 2016년 브라질 리오 올림픽에서는 복식으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건다. US 오픈, 나달은 4번시드로 출전하지만 24번시드 누카스에 의해 저지되고 손목부상으로 인해 2016년 시즌도 많은 게임을 뛰지 못한다. 


2017년 

 

2017년 시즌은 상쾌하게 출발했다. 결승까지 올라가 페더러를 만난다. 이는 2014년 프렌치오픈 이후에 처음이다. 5세트 접전 끝에 페더러에게도 2017년 호주오픈 컵을 안겨준다. 프렌치 오픈에서 스탠 바브링카를 다시 만난다. 이번엔 스트레이트 셋으로 마무리하고 10번째 프렌치 오픈 타이틀을 가져간다. 2014년 이후 처음이며 지난 3년간은 그랜드슬램 타이틀이 없었다. 이는 잦은 부상과 수술로 컨디션이 무척 안 좋았던 게 하나의 이유다. 윔블던에서는 일치감찌 뮬러에게 져서 짐을 누구보다 먼저 쌌지만 마지막 그랜드슬램 US 오픈에서는 케빈 엔더슨을 가볍게 누르고 3번째 US오픈 타이틀을 거머쥔다. 파리오픈에서 한국의 정현을 누르며 다시 1위를 재탈환했다. 이로서 어마어마한 기록들을 세우는데....

-31살로서 1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는 가장 나이 많은 선수

-30살 이상의 선수들 중에 가장 먼저 시즌을 1위로 마무리 한 선수 

-랭킹 1위를 방어하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횟수가 3번인 유일한 선수

 


2018년

 

호주오픈은 힙에 또 문제가 생겨서 클리치와의 준결승 경기를 포기한다. 프렌치 오픈에서는 도미닉 팀을 만나 17번째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기록한다. 윔블던에서는 조코비치와 5시간 17분의 마라톤 경기 이후에 아깝게 패한다. 스페인의 데이비드 페레르를 상대한다. 이 매치는 페레르의 선수생활 마지막 그랜드슬램 매치였다. 페레르는 안타깝게도 부상으로 인해 경기를 포기한다. 준결승에서 델 포트로를 만나지만 무릎 통증으로 인해 이번엔 나달이 경기를 포기한다. 


2019년 

 

호주오픈 결승에서 노박 조코비치를 다시 만나지만 이번에도 힘도 못써보고 스트레이트 셋으로 눈물을 머금는다. 하지만 프렌치 오픈의 사나이 나달은 결승에서 다시 도미닉 팀을 만나 12번째 프렌치오픈 컵에 키스를 한다. 윔블던 준결승에서 페더러를 만난다. 페더러가 올라갔고 결국 결승에서 조코비치에 패한다. 


나달은 그의 부모와 여동생 마리아 이사벨과 함께 아직도 고향에 살고있다.

2009년 6월 한 스페인 신문과 뉴욕타임즈는 그의 부모가 별거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어릴적 그는 일본 에니메이션 드래곤볼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했다. 

 

나달은 아주 오래 사귄 여자친구 마리아 프란시스카와 올해 1월 결혼발표를 하였다. 

 


 

이로서 현재까지 정리해 봤습니다. 프렌치 오픈 컵은 선수생활 동안 몇 개나 들어 올릴까요? 

정말 지금까지의 그랜드슬램 기록들만 봐도 숨 막히는 혈전입니다. 

정말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이 프로들의 전쟁...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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